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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19101945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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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특정되는 항목 17개를 5년 단위로 세었다. 가장 높은 칸 9개. 구획 전체에 걸쳐 때를 특정할 수 없는 항목 32개는 막대에서 뺐다.
도해 · 이 아카이브의 데이터에서 그림 · 장면 재현 아님
1910~1945년

이 시기 기록을 다루는 법

이 구획의 기록은 세 겹으로 어긋나 있다. 국적이 일본으로 적히고, 이름이 일본식으로 남고, 조선인이 연 대회는 1938년 이후 끊긴다. 세 가지를 지우면 읽기는

1910~1945년

일본 대표로만 나갈 수 있었던 시기

국제대회에 나가려면 일본 대표로 선발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 한반도 출신 선수의 기록은 국적이 일본으로 남아 있고, 이름도 일본식 음독으로 적힌 것이

1910~30년대

자전거 경기의 인기

1913년 4월 13일 용산 연병장에서 신문사가 연 경주에서 엄복동이 우승했다. 일본인 선수를 이긴 조선인 선수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며 그는 대중적 인물이 되었

1919년 2월 18일

조선체육협회

재조선 일본인이 중심이 되어 세운 체육 단체. 조선인이 세운 조선체육회보다 한 해 앞서며, 두 단체가 같은 땅에서 나란히 대회를 열다가 1938년에 하나가 다른

1920년대

1920년대라는 틈

3·1운동 뒤 통치 방식이 바뀌며 신문과 단체 설립이 일부 허용되었다. 조선체육회가 1920년에 설 수 있었던 것도 그 틈에서였고, 그래서 이 아카이브의 일제강점

1920~30년대

조선인 심판과 임원

대회를 열려면 규칙을 아는 사람과 판정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선수 못지않게 심판과 임원을 길러 낸 것이 조선체육회의 일이었고, 이 층이 있었기에 광복 직후 석

1920년대

여자부 대회의 신설

정구와 육상을 시작으로 여자부를 둔 대회가 생겼다. 여학교 대항전이 그 바탕이었고, 여성이 관중 앞에서 겨루는 일 자체가 논쟁거리이던 조건에서 열린 자리다.

1920~40년대

일제강점기의 야구

조선체육회의 첫 대회가 야구였을 만큼 이른 시기부터 자리를 잡았다. 중등학교 대항전이 중심이었고, 관중이 가장 많이 드는 종목 가운데 하나였다.

1920~40년대

일제강점기의 축구

장비가 적게 들고 넓은 터만 있으면 되어 가장 널리 퍼진 종목. 경평축구가 대표하는 도시 대항의 열기와, 학교·지역 팀이 층층이 쌓인 구조가 함께 있었다.

1920~40년대

농구와 배구의 확산

청년회와 학교를 통해 들어온 두 구기가 이 시기 학교 체육의 주요 종목이 되었다. 실내나 좁은 터에서도 되는 조건이 보급에 유리했고, 광복 후 여자 배구·농구가

1920~30년대

관중이라는 것

경기장이 생기고 신문이 대회를 알리면서 '보러 가는 사람'이 생겼다. 집회가 막힌 조건에서 수천 명이 한자리에 모여 한편을 응원하는 일은 스포츠에서만 가능했고,

1920~40년대

지역과 스포츠

경성 바깥에도 평양·대구·부산 같은 도시마다 팀과 대회가 섰다. 전조선 대회가 지역 대표를 모으는 구조였기 때문이며, 경평축구는 그 가운데 두 도시의 대결이 특히

1920~40년대

체육 교사라는 직업

학교마다 체육을 맡는 교사가 생기면서 운동을 업으로 삼는 첫 직업군이 만들어졌다. 조선씨름협회를 세워 규칙을 통합한 것도 고등보통학교 체육교사들이었고, 이 층이

1920~30년대

조선체육회의 살림

총독부 지원 없이 대회를 열려면 회비와 후원, 신문사의 협력에 기대야 했다. 신문사가 대회를 직접 주최하는 방식이 자리 잡은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으며, 재정이

1920~40년대

전통 종목의 자리

씨름과 활쏘기는 근대 대회 형식을 갖추며 살아남았고, 석전처럼 위험한 것은 금지되어 사라졌다. 무엇이 '전통'으로 남고 무엇이 없어졌는가는 그 자체가 이 시기에

1920~40년대

사정의 존속

조선의 활터 문화가 이 시기에도 이어져 편사 대회가 열렸다. 근대 스포츠가 밀려드는 가운데 조선에서 온 형식이 그대로 남은 드문 경우이며, 오늘날 국궁으로 이어진

1920~30년대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종목별로 흩어져 있던 전조선 대회가 종합대회로 묶여 갔다.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형태가 이때 잡히며, 조선체육회가 해산되는 1938년까지 이어진다.

1920~30년대

신문사와 체육 대회

조선인 신문이 대회를 직접 주최하고 후원했다. 체육이 신문의 사업이자 지면이 되었고, 그 덕에 이 시기 대회 기록이 남았다. 동시에 체육이 언론을 통해 민족의 일

1920~40년대

스포츠와 민족 정체성

집회와 결사가 막힌 조건에서 경기장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모여 한편을 응원할 수 있는 드문 자리였다. 경평축구의 열기나 마라톤 우승에 대한 반응이 스포츠의 크기를

1920~40년대

일본 무도의 학교 교육

유도와 검도가 학교 교과로 들어왔다. 광복 후 한국이 유도에서 국제대회 메달 235개를 쌓게 되는 바탕에 이 시기의 보급이 있다는 점은 이 아카이브가 다뤄야 할

1920~30년대

중등학교 대항전

학교끼리 겨루는 야구·축구 대회가 이 시기 스포츠의 중심이었다. 성인 실업팀이 아직 얇았고, 학교가 선수를 길러 내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1920~30년대

여자 체육의 확대

여학교 대항전과 여자부 종목이 생기며 여성이 경기에 나서는 일이 늘었다. 복장과 관중 앞 노출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됐고, 그 논쟁 자체가 이 시기 여자 체육의 조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 창립

오늘날 대한체육회의 전신. 식민지 조건에서 조선인이 스스로 세운 체육 조직이라, 이후 체육이 민족운동과 겹치는 배경이 된다.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조선체육회가 연 첫 대회. 전국체육대회는 이 대회를 제1회로 세어 회차를 이어 오고 있어, 오늘의 전국체전이 1920년에서 시작한 이유가 여기 있다.

1920년대 초 이후

전조선축구대회

야구에 이어 축구도 전조선 규모의 대회를 갖게 되었다. 조선체육회가 직접 열다가 1933년 축구협회가 서면서 넘겨받는다. 경평축구의 열기도 이 대회 구조 위에서

1920년대

전조선정구대회

관청과 학교를 중심으로 퍼진 정구가 전조선 대회를 갖게 되었다. 여자부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생긴 종목이기도 하다.

1920년대 이후

전조선육상경기대회

달리고 던지고 뛰는 기록을 재는 대회. 1930년대 조선 마라톤이 세계 정상권에 닿는 바탕에 이 대회에서 쌓인 기록과 선발 구조가 있다.

1920~30년대

종목별 단체의 등장

축구·씨름·육상처럼 종목마다 협회가 서면서, 조선체육회가 모든 대회를 직접 열던 구조가 갈라졌다. 오늘날 종목 단체가 대회를 맡는 방식의 출발점이며, 1938년

1925~1945년

경성운동장의 대회들

전조선 대회와 조선신궁 경기대회가 같은 운동장에서 번갈아 열렸다. 조선인이 세운 대회와 총독부가 주관한 대회가 한 시설을 나눠 쓴 셈이라, 이 시기 체육의 구조가

1925년

경성운동장 개장

한반도 첫 대형 종합 경기장. 대회를 한곳에 모을 수 있는 시설이 생기며 관중 스포츠의 조건이 만들어졌고, 광복 후에는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꿔 가

1920~40년대

조선신궁 경기대회

총독부가 주관한 종합 경기대회. 조선인이 세운 전조선 대회와 나란히 존재했고, 두 계열의 대회가 같은 땅에서 다른 깃발 아래 열린 것이 이 시기 체육의 구조를 그

1927년 9월

조선씨름협회

고등보통학교 체육교사들이 지역마다 다르던 씨름을 조사해 왼씨름으로 규칙을 통합하고 협회를 세웠다. 이어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어,

1920~30년대

이영민

야구와 육상을 함께 한 선수. 경성운동장에서 조선인이 친 첫 홈런의 주인공으로 전하며, 뒷날 고교야구 타격상에 그의 이름이 붙는다. 종목이 갈라지기 전 시대의 선

1929년 시작

경평축구대항전

경성과 평양 두 도시가 맞붙은 축구 대항전. 분단 이전 한반도 남북이 정기적으로 겨룬 거의 유일한 대회이고, 광복 후 한 차례 더 열린 뒤 끊겼다.

1930년대

1930년대 조선 마라톤

이 시기 마라톤은 조선인 선수가 세계 정상권에 닿은 거의 유일한 종목이었다. 장비와 시설이 필요 없고 몸 하나로 겨루는 종목이라는 점이 식민지 조건에서 유리하게

1932년

1932년 로스앤젤레스의 조선인 선수

마라톤에 조선인 선수 둘이 일본 대표로 출전해 입상권 가까이 들어왔다. 시상대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네 해 뒤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선이 여기서 시작하고, 공식 기록

1933년

조선축구협회

축구를 따로 맡는 조직이 생기기 전까지 전조선축구대회는 조선체육회가 직접 열었다. 1933년 이 협회가 서면서 종목별 단체가 대회를 맡는 구조로 넘어간다.

1935년

손기정의 1935년 기록

베를린 한 해 전, 도쿄에서 열린 마라톤에서 당시 세계 최고로 인정된 기록을 냈다. 이듬해의 우승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며, 이 기록도 일

1930~40년대

김용식

축구 선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조선인으로 일본 대표팀에 뽑혀 나갔다. 마라톤 두 사람 말고도 이 시기 한반도 출신 선수가 다른 종목에서 국제 무대에 섰음

1936~1938년

베를린 이후의 조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신문이 정간되고 관련자가 처벌된 뒤, 체육에 대한 감시가 눈에 띄게 강해졌다. 두 해 뒤 조선체육회가 해산되는 흐름이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우승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남승룡이 3위에 올랐다. 두 사람은 일본 대표로 출전했고, 공식 기록에 이름도 일본식으로 남았다. 이 어긋남 자체가 이 항목의 내용이

1936년

남승룡

같은 마라톤에서 3위에 올랐다. 시상대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손기정의 월계수 화분을 부러워했다는 회고가 널리 전한다. 우승자 뒤에 가려졌으나 같은

1936년 8월 25일

일장기 말소 사건

신문이 손기정의 시상대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다. 관련자가 처벌받고 신문은 정간되었다. 사진 한 장이 사건이 된 드문 사례다.

1938~1945년

기록이 비는 일곱 해

조선체육회가 해산된 1938년부터 광복까지, 조선인이 여는 대회의 기록이 거의 남지 않는다. 이 아카이브에서 가장 짧으면서 가장 비어 있는 구간이며, 빈 것 자체

1940년

1940년 도쿄 올림픽 취소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던 대회가 전쟁으로 취소되었다. 한반도 출신 선수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을 기회가 사라졌고, 다음 올림픽은 광복 후 19

1938년

조선체육회 강제 해산

조선인이 세운 체육 조직이 해산되어 총독부 계열 단체로 흡수되었다. 열여덟 해 동안 이어 온 전조선 대회가 끊기고, 조직이 되살아나는 것은 광복 직후다.

1930년대 말~1945년

전시 체육의 군사화

전쟁이 길어지며 체육이 체력 동원과 훈련으로 바뀌었다. 경기와 대회는 줄고 행군·수영·무도 같은 실용 항목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개화기의 병식체조가 다른 이름으

1940년 이후

창씨개명과 선수의 이름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제한 정책이 시행되면서, 기록에 남는 선수 이름도 바뀌었다. 1936년에 이미 일본식 음독으로 적히던 문제가 제도로 굳은 셈이며, 이

1940~1945년

전시 동원과 선수

전쟁이 길어지며 대회가 줄고 선수가 징집과 노동에 동원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이 아카이브의 대회 기록이 비어 가는 이유이고, 광복 후 다시 시작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