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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19122030

프로복싱

10203040506070809020001020
때가 특정되는 항목 29개를 10년 단위로 세었다. 가장 높은 칸 14개. 구획 전체에 걸쳐 때를 특정할 수 없는 항목 21개는 막대에서 뺐다.
도해 · 이 아카이브의 데이터에서 그림 · 장면 재현 아님
1912년 · 1929년

한국 근대 복싱의 시작

권투 구락부가 언제 처음 섰는지는 자료마다 갈린다. 1912년 유각권구락부와 1929년 조선권투구락부가 함께 거론되는데, 신문 색인으로 대조하니 뒤쪽만 지면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 복싱 동메달

첫 올림픽 참가에서 얻은 동메달 두 개 가운데 하나가 복싱에서 나왔다. 아마추어 복싱이 광복 직후부터 국제 무대에서 통했다는 뜻이고, 이 바탕 위에 프로복싱이 선

1950년대 이후

국내 기구

프로 경기를 관장하고 국내 타이틀을 인정하는 기구가 1950년대에 섰다. 아마추어 체육이 대한체육회 아래 묶인 것과 달리 프로는 별도 조직으로 굴러갔고, 그래서

1960년대 이후

감량

체급 경기는 계체 전 며칠을 굶고 물을 끊는 일이 따라붙는다. 체격의 불리를 지워 주는 대신 다른 부담을 지우는 구조이며, 가벼운 체급에 한국 챔피언이 몰린 만큼

1960년대 이후

동양 타이틀

세계 타이틀 아래 지역 기구의 타이틀이 있었고, 한국 선수 대부분이 세계전에 오르기 전 이 벨트를 거쳤다. 국내 챔피언에서 동양 챔피언, 그리고 세계 챔피언으로

1960~90년대

국내 타이틀과 신인왕전

체급마다 한국 챔피언이 있었고 신인을 뽑는 대회가 따로 있었다. 세계 챔피언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층에서 올라왔다는 것이 이 항목의 요점이며, 이 층

1960~90년대

프로모터와 관장

경기를 잡고 돈을 대는 사람과 선수를 기르는 사람이 프로 종목의 뼈대였다. 아마추어와 달리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판을 만들었다는 뜻이며, 그래서 판을 만들 사람이

1960~80년대

복싱과 계층

학교 운동부도 실업팀도 거치지 않고 세계 정상에 닿을 수 있는 길이었으므로, 복싱은 다른 종목이 데려오지 않는 사람들을 데려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통로라는 말이

1960~90년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딴 선수가 프로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다. 아마추어 복싱이 국제대회 메달 136개를 쌓은 층과 프로 챔피언들이 나온 층이 따로 있지

1960~80년대

체육관이라는 통로

동네 체육관이 선수를 길러 냈다. 학교 운동부나 실업팀을 거치지 않고도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고, 그래서 복싱은 다른 종목과 다른 계층에서

1963년

장충체육관

국내 첫 실내 종합 체육관.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이 열린 무대이자 1960~70년대 실내 스포츠의 중심이었고, 복싱이 대중 관람 스포츠가 되는 물리적 조건이 되

1960년대 이후

같은 체급, 다른 이름

한 기구가 주니어미들급이라 부르는 체급을 다른 기구는 슈퍼웰터급이라 부른다. 김기수의 타이틀이 자료마다 다른 이름으로 적히는 것도 이 때문이고, 이 아카이브가 체

1960~90년대

안방에서 열린 세계전

세계 타이틀전을 국내에서 여는 일이 흔했다. 장충체육관을 시작으로 실내 체육관이 갖춰지고 중계가 붙으면서 가능해진 것이며, 관중과 시청자가 모이는 종목이라야 판이

1966년 이후

복싱 기록을 다루는 법

이 구획의 기록은 다른 구획과 성격이 다르다. 인정 기구가 여럿이라 '세계 챔피언'이 무엇인지가 기구마다 다르고, 체급 이름도 갈리며, 이열우처럼 어느 기구였는지

1966년 이후

역대 세계 챔피언 명단

1966년 김기수 이후 한국은 여러 기구에 걸쳐 여러 명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 기구별 명단은 각각 항목으로 세웠고, 사람마다 체급과 재위 기간을 확정하는 일

1966년 이후

WBA 세계 챔피언 계보

김기수를 시작으로 홍수환·유제두·김태식·김환진·유명우·박찬영·백인철·박종팔·김봉준·문성길·이열우·최희용·박영균·이형철·최용수·백종권이 이 기구의 체급별 타이틀을

1960~90년대

가벼운 체급이라는 조건

한국이 배출한 세계 챔피언은 플라이급에서 슈퍼밴텀급 사이에 몰려 있다. 체격이 성적을 가르는 다른 종목과 달리 복싱은 체급으로 그 조건을 지워 주었고, 그것이 이

1966년 6월

김기수 세계 타이틀 획득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꺾고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 되었다. 한국 선수의 첫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이며, 안방에서 얻은 것이라는 점

1970년대 이후

화면 속의 복싱

타이틀전 중계가 시청률에서 다른 무엇도 넘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고, 뒤에는 링을 소재로 한 영화와 만화가 나왔다. 종목이 얇아진 뒤에도 그 이미지가 오래 남은 것

1970~80년대

복싱과 텔레비전

세계 타이틀전이 지상파 생중계로 나가면서 복싱은 전 국민이 같은 시간에 보는 스포츠가 되었다. 링 하나와 두 사람만 있으면 되는 중계 조건이 초기 방송 환경에 맞

1970~90년대

원정이라는 조건

챔피언의 안방에서 도전하면 판정으로는 이기기 어렵다는 것이 오래된 통념이었다. 홍수환이 더반에서, 김철호가 베네수엘라에서 타이틀을 가져온 것이 특별하게 다뤄지는

1970~80년대

한국 프로복싱의 융성기

세계 타이틀 보유자가 끊이지 않고, 타이틀전이 지상파로 중계되며 시청률이 대회 중계를 앞서던 시기다. 체급이 가벼운 종목이라 체격 열세가 덜했다는 점, 그리고 개

1974년 7월 3일

홍수환 첫 세계 타이틀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챔피언 아널드 테일러를 15라운드 판정으로 꺾고 WBA 밴텀급 챔피언이 되었다. 한국 두 번째 세계 챔피언이자 원정에서 타이틀을 얻은 첫 사례

1975년 6월

유제두 세계 타이틀 획득

일본 원정에서 챔피언 와지마 고이치를 KO로 꺾고 WBA 슈퍼웰터급 챔피언이 되었다. 김기수 이후 아홉 해 만에 나온 한국의 세 번째 세계 챔피언이며, 1970년

1976~1977년

염동균

WBC 슈퍼밴텀급 타이틀을 가졌다. 한국 선수가 WBA 밖의 기구에서 세계 타이틀을 얻기 시작한 이른 사례이며, 이후 한국 챔피언은 두 기구에 걸쳐 나온다.

1970년대 이후

WBC 세계 챔피언 계보

염동균(슈퍼밴텀급)·박찬희(플라이급)·김철호(슈퍼플라이급)·장정구(라이트플라이급)의 재위가 확인되었다. WBA 계열과 달리 가벼운 체급에 더 몰려 있으며, 남은

1970년대 이후

복싱이 남긴 말

'4전5기'는 스포츠 밖에서 더 많이 쓰이는 관용구가 되었다. 경기 하나가 언어에 남은 사례이며, 이 아카이브에서 성적이 아니라 말로 남은 것을 세야 하는 몇 안

1977년 11월 27일

홍수환 4전5기

WBA 슈퍼밴텀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 파나마의 엑토르 카라스키야에게 2라운드에만 네 번 쓰러지고도 3라운드에 역전 KO로 이겼다. 경기 자체보다 '네 번 넘어지

1979년 3월 18일

박찬희

멕시코의 미겔 칸토를 15라운드 판정으로 꺾고 WBC 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다. 다섯 차례 방어에 성공했으며, 장정구·유명우 이전 시기에 가장 길게 타이틀을 지킨

1980년대 이후

벨트를 놓은 뒤

은퇴 뒤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여러 챔피언에게 따라붙는다. 최용수도 은퇴 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한다. 한 사람의 몸으로 오른 자리라 내려

1980년

김태식

WBA 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다. 같은 시기 박찬희가 WBC 플라이급을 가지고 있어, 한 체급의 두 기구 타이틀을 한국 선수가 나눠 가진 드문 국면이 만들어진다.

1981년

김환진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다. 네 해 뒤 유명우가 같은 기구의 같은 체급 타이틀을 가져 열일곱 차례 방어하므로, 한국 복싱의 가장 긴 재위가 서는 자리를

1981년 1월 25일

김철호

베네수엘라 원정에서 챔피언 라파엘 오로노를 KO로 꺾고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다. 남미 원정에서 타이틀을 빼앗아 온 사례로, 홍수환의 파나마 경기와 함

1982년 11월

김득구 사망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경기에서 쓰러져 나흘 뒤 숨졌다. 이 죽음은 세계 복싱의 규정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 주요 기구의 타이틀전이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줄고

1980년대

기구가 넷이 되다

1980년대에 인정 기구가 둘에서 넷으로 늘면서 한 체급에 챔피언이 여럿 생겼다. 챔피언 수가 늘어난 만큼 하나하나의 무게는 줄었고, 이 아카이브가 '역대 챔피언

1980년대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타이틀전 거리가 세 라운드 줄었다. 1982년 김득구의 죽음이 그 계기가 되었으므로, 한국 복싱사가 세계 복싱의 규정을 바꾼 유일한 지점이 이 세 라운드다. 홍수

1980년대 이후

링 위의 안전

라운드 축소와 함께 계체 시점, 링 옆 의료진, 경기 중단 기준이 손질되었다. 다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종목이 스스로를 규제한 과정이며, 이 아카이브에서 규정이

1983~1988년

장정구

WBC 라이트플라이급 타이틀을 1983년 3월부터 1988년 6월까지 5년 3개월 동안 지켰다. 열다섯 차례 방어에 성공한 뒤 스스로 벨트를 반납했다. 같은 시기

1985~1988년

두 챔피언이 나란히 있던 시절

장정구가 WBC 라이트플라이급을, 유명우가 WBA 주니어플라이급을 동시에 지키던 3년 남짓. 두 체급은 한계 체중이 사실상 같아 통합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으나

1985~1991년

유명우

W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을 1985년 12월부터 1991년 4월까지 5년 4개월 동안 지켰다. 열일곱 차례 방어는 한국 프로복싱 최다 기록으로 아직 깨지지 않

1987년

박찬영

WBA 밴텀급 챔피언이 되었다. 이듬해 문성길이 같은 체급 타이틀을 가지므로, 밴텀급은 홍수환(1974) 이후 한국 챔피언이 세 번 나온 체급이 된다.

1987년 12월 6일

박종팔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이 되었다. 한국 챔피언이 대부분 가벼운 체급에서 나오던 흐름에서 벗어난 사례이며, 이태 뒤 백인철이 같은 체급에서 타이틀을 가진다.

1988년 8월 14일

문성길

부상 판정승으로 WBA 밴텀급 챔피언이 되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의 챔피언이며, 장정구가 벨트를 반납하고 유명우가 아직 지키고 있던 시점에 나온 세 번째 세

1989년

김봉준

WBA 미니멈급 챔피언이 되었다. 가장 가벼운 체급으로, 한국 챔피언이 나온 체급의 아래쪽 끝에 해당한다.

1989년

이열우

1989년 라이트플라이급 세계 타이틀을 얻었다. 인정 기구가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다 — 백과사전은 WBA 챔피언 목록에 올려 두었고 다른 자료는 WBC 라이트

1989년 5월 28일

백인철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이 되었다. 박종팔에 이어 같은 체급에서 나온 챔피언으로, 1980년대 말 한국 복싱이 중량급까지 뻗었음을 보여 준다.

1990년대 이후

프로복싱의 쇠퇴

1990년대를 지나며 세계 타이틀 보유자가 드물어지고 관중과 중계가 함께 빠졌다. 프로야구·축구가 자리를 대신했고, 무엇보다 복싱이 맡았던 사회적 기능 — 가난에

1995년 10월 21일

최용수

아르헨티나의 빅토르 우고 파스를 10회 TKO로 꺾고 WBA 슈퍼페더급 챔피언이 되었다. 일곱 차례 방어에 성공했으나 여덟 번째에 실패했고, 융성기의 끝자락에 선

2000년대 이후

격투기로 옮겨 간 자리

프로복싱이 얇아진 자리에 종합격투기가 들어왔다. 맨몸으로 세계 무대에 오른다는 성격이 겹치는 종목이며, 복싱이 맡던 사회적 기능이 어디로 갔는가를 묻는다면 여기가

2000년대 이후

오늘의 체육관

선수를 기르던 체육관이 운동하러 오는 사람을 받는 곳으로 바뀌었다. 프로 선수를 배출하는 통로에서 생활 체육 시설로 성격이 옮겨 간 것이며, 엘리트 체육과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