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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19451970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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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특정되는 항목 32개를 5년 단위로 세었다. 가장 높은 칸 9개. 구획 전체에 걸쳐 때를 특정할 수 없는 항목 27개는 막대에서 뺐다.
도해 · 이 아카이브의 데이터에서 그림 · 장면 재현 아님
1945~1970년대

전국체전이라는 축

시도 대항으로 치러진 전국체전이 선수 발굴과 지역 체육의 중심이었다. 국제대회 성적을 내는 구조가 서기 전까지 한국 체육의 한 해는 이 대회를 축으로 돌았고, 회

1945년 이후

전국체육대회 재개

일제강점기에 끊겼던 전조선 종합대회가 다시 열렸다. 회차는 1920년 제1회부터 이어 세어, 식민지 시기의 공백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안고 간다.

1945년 11월

조선체육회 부활

1938년 강제 해산된 조직이 광복 석 달 만에 다시 섰다. 오늘날 대한체육회로 이어지며, 회차를 1920년부터 세는 전국체육대회도 이때 되살아난다.

1950~60년대

체육 교사 양성

대학에 체육 관련 학과가 생기며 교사와 지도자가 제도적으로 길러졌다. 일제강점기에 체육 교사들이 협회를 세우고 규칙을 정비했던 흐름이 여기서 학과와 학위로 이어진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 가입

국가올림픽위원회로 승인받았다. 정부 수립보다 앞선 일이라,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라는 이름이 국가보다 먼저 선 셈이 된다. 이듬해 런던 참가의 전제가 되는 절차

1947년 이후

씨름의 전국대회화

일제강점기에 규칙을 통합한 씨름 단체가 1947년 대한씨름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전조선씨름대회는 전국씨름선수권대회가 된다. 조선의 단오 씨름에서 시작한 것이 이

1950~60년대

두 개의 국가올림픽위원회

남쪽이 1947년에 승인받고, 북쪽도 뒤이어 별도의 위원회로 국제 조직에 들어갔다. 한반도가 국제 스포츠에서 두 단위로 나뉘어 셈해지기 시작한 지점이며, 이 아카

1947~1948년

태극기를 달고 나간다는 것

1947년 보스턴과 1948년 런던에서 선수들이 처음으로 자국 깃발을 달고 국제 대회에 섰다. 열두 해 전 베를린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야 했던 일과 같은 선

1947년 4월

서윤복 보스턴 마라톤 우승

광복 후 국제 대회에서 거둔 첫 큰 성과. 손기정이 지도자로 동행했다. 11년 전 베를린에서 일본 대표로 뛰던 사람이, 이번에는 태극기를 단 선수를 데리고 갔다.

1948년 이후

대한체육회로

정부가 서면서 조선체육회가 나라 이름을 딴 조직으로 바뀐다. 1920년 창립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므로 이름은 세 번 바뀌었어도 연혁은 한 줄이며, 전국체육대회 회차

1950~60년대

아마추어 복싱의 층

1948년 첫 올림픽 동메달 이후 복싱은 1960년대 내내 메달을 내는 종목이었다. 이 층이 두꺼웠기 때문에 1966년 김기수의 프로 세계 타이틀이 갑자기 나온

1948~1960년대

선수단 규모라는 문제

가난한 나라가 선수단을 보내는 일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1948년 런던에 갈 때는 여비를 모으려 후원권을 팔았다는 기록이 전하며, 국제대회 참가가 성적 이전에

1948~1952년

김성집

역도 선수. 1948년과 1952년 두 대회에서 연달아 동메달을 얻어, 대한민국 이름으로 나간 초기 두 올림픽에서 모두 시상대에 오른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1948년 1월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첫 참가

하계보다 먼저 치러진 동계 대회에 소수의 선수가 나갔다. 이 첫 참가로부터 동계 올림픽 첫 메달까지 마흔네 해, 첫 금메달까지도 같은 마흔네 해가 걸린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첫 참가

독립국 이름으로 처음 나간 하계 올림픽. 역도와 복싱에서 동메달 두 개를 얻었고 종합 33위였다. 이 대회부터 이 아카이브의 국제대회 기록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1950~60년대

유도의 재개

일제강점기 학교 교과로 들어왔던 종목이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이 껄끄러운 연속성 위에서 유도는 훗날 국제대회 메달 235개를 쌓아, 이 아카이브에서 가장 오래

1950~60년대

손기정 이후의 마라톤

1947년과 1950년 보스턴의 성과 뒤로 국제 마라톤에서 큰 결과가 오래 나오지 않는다. 1992년 황영조가 나오기까지 마흔 해 넘게 걸리며, 1930년대와 1

1950~60년대

전후 여자 체육

여학교와 실업팀을 통해 여자 배구·농구·정구가 자리를 잡았다. 1967년 여자 농구의 세계선수권 준우승은 이 층에서 나온 것이며, 남자 종목보다 앞서 세계 무대에

1950~60년대

스포츠 지면과 중계

신문이 스포츠 지면을 따로 두고 라디오가 경기를 중계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신문사가 대회를 주최하던 구조가 보도 중심으로 옮겨 갔다.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이

1950~70년대

고교 야구의 시대

신문사가 여는 고교 야구 대회가 관중을 가장 많이 모으는 경기였다. 프로 리그가 없던 시절 야구의 정점이 학교에 있었다는 뜻이고, 지역 대항의 감정이 여기 실렸다

1950~60년대

북한의 체육 체제

북한이 국가 주도로 선수를 길러 국제 무대에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다. 남쪽이 1962년 법과 1966년 선수촌으로 같은 방향을 잡기 전에 이미 그 구조를

1950~1953년

전쟁과 체육

전쟁으로 시설이 무너지고 선수가 흩어졌다. 전국체육대회가 끊기고 아시안게임 첫 대회에 나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1952년 올림픽에는 선수단을 보냈고, 그것이 이

1950~60년대

학원 스포츠의 시대

선수를 길러 내는 곳이 여전히 학교였다. 고교 야구와 대학 축구가 최고 인기 종목이었고, 성인 무대는 실업팀이 대신했다. 프로 리그가 없던 시절 스포츠의 구조가

1950~70년대

실업팀

기업과 관공서가 팀을 꾸려 선수를 직원으로 고용했다. 프로가 없던 시절 성인 선수가 운동을 계속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길이며, 이 구조는 프로 리그가 생긴 뒤에

1950~60년대

라디오 중계의 시대

텔레비전이 퍼지기 전 경기는 라디오로 전해졌다. 보이지 않는 경기를 말로 그려 내는 중계가 스포츠를 대중의 것으로 만들었고,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이 그 자리

1950년 4월

보스턴 마라톤 1·2·3위 석권

한국 선수 셋이 시상대를 모두 차지했다. 두 달 뒤 전쟁이 났고, 이 성과는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1951년

제1회 아시안게임 불참

아시아 종합대회의 첫 대회가 열렸으나 전쟁 중이라 나가지 못했다. 아시안게임은 이후 한국이 가장 많은 메달을 쌓는 무대가 되는데, 그 시작점에 이 공백이 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전쟁 중에 선수단을 보내 동메달 두 개를 얻었다. 국토가 전장인 나라가 대표팀을 꾸려 보낸 것 자체가 이 대회의 내용이다.

1953~1950년대 말

휴전 이후의 재건

부서진 경기장을 다시 짓고 끊긴 대회를 되살리는 일이 이 시기 체육 행정의 거의 전부였다. 원조 물자와 미군 시설에 기대는 부분이 컸고, 그런 조건에서도 1954

1950~60년대

전후 체육 시설

전쟁으로 부서진 경기장을 다시 짓고 새 시설을 올리는 일이 이 시기 체육 행정의 큰 몫이었다. 1963년 장충체육관이 국내 첫 실내 종합 체육관으로 문을 여는 것

1950~60년대

학교 체육 교육과정

교육과정이 만들어지며 체육이 정규 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개화기의 병식체조, 일제강점기의 전시 체련을 지나 처음으로 '체육'이라는 이름의 교과가 국가 교육과정에

1950~60년대

레슬링의 부상

체급으로 겨루고 장비가 거의 없어도 되는 종목이라 전후 조건에 맞았다. 1966년 장창선의 세계선수권 우승과 1976년 양정모의 첫 올림픽 금메달이 이 시기에 쌓

1950~60년대

아시아 최강이던 시절

아시안컵 첫 두 대회를 연달아 우승하고 월드컵 본선에도 올랐다. 이후 아시안컵 우승이 다시 나오지 않으므로, 한국 축구가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있던 시기는 오히려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첫 참가

제2회 대회부터 참가해 금 8 · 은 6 · 동 5 로 종합 3위에 올랐다. 첫 참가에서 곧바로 3위를 한 것이며, 아시안게임은 이후 한국이 가장 많은 메달을 쌓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첫 출전

한국이 처음 나간 월드컵 본선. 전쟁이 끝난 이듬해였고 두 경기에서 크게 졌다. 다음 본선까지 서른두 해가 걸린다.

1954년 3월

1954년 월드컵 예선

전쟁이 끝난 이듬해, 일본에서 두 경기를 치러 본선에 올랐다. 광복 아홉 해 만에 옛 식민 본국과 공을 놓고 겨룬 자리이며, 이때의 승리가 한국이 처음 월드컵 본

1955~60년대

태권도라는 이름의 정착

광복 후 도장마다 당수도·공수도·권법·화수도·수박도 같은 이름이 제각각 쓰였다. 1955년 명칭제정위원회가 '태권도'를 정했으나 곧바로 통일되지는 않았고, 196

1956년

제1회 아시안컵 우승

아시아 축구 선수권의 첫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태 전 월드컵에서 크게 졌던 팀이 아시아에서는 정상에 선 것이며, 다음 대회에서도 우승해 연패한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복싱에서 은메달 하나를 얻었다. 대한민국 이름으로 나간 세 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메달 색이 처음 동에서 은으로 올라간 대회다.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금 8 · 은 7 · 동 12 로 종합 3위. 광복 열세 해 만에 옛 식민 본국에서 열린 대회에 나가 3위를 했다.

1960년대

태권도의 해외 보급

사범이 나라 밖으로 나가 도장을 열면서 종목이 퍼지기 시작했다. 국가가 성적을 내려고 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나가서 심은 것이며, 이 보급이 뒷날 태권도가 올림

1960년

제2회 아시안컵 우승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다시 우승해 두 대회 연속 정상에 섰다. 한국 축구가 아시아 최강이던 시기이며, 이 다음 우승까지는 오래 기다리게 된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메달 없이 끝났다. 1948년 첫 참가 이후 유일하게 빈손으로 돌아온 하계 올림픽이며, 이 아카이브의 대회별 집계에도 1960년만 빠져 있다.

1960년대

북한의 국제 무대 진입

북한이 국제 조직에 가맹하고 대회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다. 1964년 동계 올림픽에서 첫 메달, 1966년 월드컵 8강, 1972년 첫 올림픽 금메달이

1960년대

여자 배구의 성장

실업팀을 바탕으로 여자 배구가 국제 대회에서 자리를 잡아 간다. 1976년 몬트리올에서 동메달을 따 한국 구기 종목의 첫 올림픽 메달이 되는데, 그 준비가 이 시

1960~70년대

프로레슬링

장충체육관을 무대로 한 흥행 종목. 김일·장영철·천규덕이 이름을 얻었고, 1967년 김일이 세계 타이틀을 딴 장면은 대한뉴스에 실렸다. 전방부대 위문과 자선 경기

1960년대

국가가 체육을 맡기 시작할 때

국민체육진흥법이 서고 태릉선수촌이 문을 열면서, 체육이 민간 조직의 일에서 국가 사업으로 옮겨 갔다. 성적이 국가의 성취로 셈해지는 구조가 이때 만들어지고, 19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금 4 · 은 9 · 동 10 으로 종합 6위. 참가한 아시안게임 가운데 순위가 가장 낮았던 대회이며, 이 성적이 1960년대 체육 정책이 손보아야 할 지점으로

1960년대 초

국민체육진흥법 제정

체육을 국가가 진흥한다는 것을 법으로 정했다. 시설·지도자·재원을 국가가 대는 구조가 여기서 시작되며, 뒤이어 태릉선수촌이 서고 대표팀 합숙 체제가 자리 잡는다.

1963년

1963년 남북 단일팀 회담

이듬해 도쿄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나가기 위한 남북 회담이 열렸으나 결렬되었다. 분단 이후 첫 체육 회담이며, 실제 단일팀이 성사되기까지는 스물여덟 해가 더 걸린다

1960년대

월남 파병과 태권도 교관

파병 부대와 함께 태권도 교관이 나가 현지 군인들을 가르쳤다. 무예가 국가 사이의 관계 속에서 옮겨 간 사례이며, 조선통신사의 마상재 시연과 성격이 겹치는 대목이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과 복싱에서 메달이 나왔다.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 올림픽이었고, 이 대회를 두고 남북이 단일팀 회담을 벌였다가 무산된 직후이기도 하다.

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

이 대회에 북한이 처음 나가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은메달을 얻었다. 한반도가 동계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첫 사례이며, 남쪽보다 스물여덟 해 앞선다.

1966년

태릉선수촌

국가대표를 한곳에 모아 합숙 훈련시키는 시설이 문을 열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 국제대회 성적의 생산 기반이 되었고, 동시에 합숙 체제를 둘러싼 논쟁의 자리이

1966년

장창선 세계선수권 우승

레슬링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다. 한국 선수가 세계선수권에서 정상에 오른 첫 사례로 꼽히며, 열 해 뒤 같은 종목에서 첫 올림픽 금메달이 나온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 12 · 은 18 · 동 21 로 종합 2위.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2위에 올랐고, 이 자리를 이후 오랫동안 지킨다.

1966년 7월

북한 월드컵 8강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올랐다. 한반도 팀이 월드컵 8강에 간 첫 사례이고, 아시아 팀으로서도 처음이었다. 남쪽은 이 대회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1967년

여자 농구 세계선수권 준우승

여자 농구 대표팀이 세계선수권에서 2위에 올랐다. 한국 구기 종목이 세계 대회에서 거둔 가장 높은 성적 가운데 하나이며, 올림픽 구기 메달보다 스물한 해 앞선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복싱에서 은메달 하나. 1960년대 내내 메달은 복싱과 레슬링 두 종목에 몰려 있었고, 첫 금메달까지는 아직 여덟 해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