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T · MMXXVI

이야기EP04

전장에서 선수단을 꾸린다는 것

1951년 아시안게임에는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올림픽에는 선수단을 보냈고, 동메달 둘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름이 국가보다 먼저 섰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은 1947년에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것은 이듬해다.

순서가 뒤집혀 있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한국'이라는 이름이 국가보다 한 해 먼저 선 셈이고, 그래서 1947년 보스턴 마라톤과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달고 뛴 일이 당시에 성적보다 크게 다뤄졌다. 열두 해 전 베를린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야 했던 일과 같은 선 위에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얻은 것은 동메달 둘, 종합 33위였다. 이 아카이브의 국제대회 기록은 여기서 시작해 오늘까지 끊기지 않는다 — 한 해만 빼고.

1950년 4월과 6월

보스턴 마라톤에서 한국 선수 셋이 1·2·3위를 모두 차지했다. 4월이었다.

두 달 뒤 전쟁이 났다.

나가지 못한 대회, 나간 대회

전쟁은 시설을 무너뜨리고 선수를 흩었다. 전국체육대회가 끊겼고,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게임에는 나가지 못했다.

아시안게임은 훗날 한국이 국제대회 메달 3,140개 가운데 가장 많은 몫을 쌓는 무대가 된다. 그 무대의 첫 대회가 이 아카이브에서 비어 있는 이유가 전쟁이다.

그런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는 선수단을 보냈다. 휴전 협정이 맺어지기 한 해 전이다. 국토가 전장인 나라가 바다 건너로 대표팀을 꾸려 보냈고, 동메달 둘을 가지고 돌아왔다.

김성집은 그 두 대회에서 모두 시상대에 올랐다. 1948년 런던과 1952년 헬싱키 — 대한민국 이름으로 나간 첫 두 올림픽에서 연달아 메달을 딴 유일한 선수다.

왜 갔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아카이브의 기록만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앞뒤에 놓인 사실들이 방향을 가리킨다.

승인이 정부보다 먼저 나왔고, 태극기를 달고 뛴 일이 성적보다 크게 보도되었고, 전쟁 중에도 선수단이 갔다. 이 셋을 나란히 놓으면 이 시기 국제대회 참가가 경기이기 이전에 존재의 증명이었다는 해석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해석은 이 아카이브의 다른 구획과도 이어진다. 서른다섯 해 동안 일본 대표로만 나갈 수 있었던 시기 바로 뒤에 이 시기가 온다.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는 조건이 그 앞에 있었다.

남은 빈칸 하나

전쟁이 끝나고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에 처음 나가 곧바로 종합 3위를 했다. 끊겼던 선이 다시 이어진다.

이 아카이브의 하계 올림픽 집계에서 비어 있는 해는 그 뒤로 둘뿐이다. 메달 없이 끝난 1960년 로마와, 불참한 1980년 모스크바. 전쟁으로 비운 칸은 1951년 아시안게임 하나로 남았다.

[근거]

이 이야기가 기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