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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18761910

개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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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특정되는 항목 20개를 5년 단위로 세었다. 가장 높은 칸 8개. 구획 전체에 걸쳐 때를 특정할 수 없는 항목 17개는 막대에서 뺐다.
도해 · 이 아카이브의 데이터에서 그림 · 장면 재현 아님
개화기

격구와 마상재의 끝

무과가 폐지되고 군대가 서구식으로 바뀌면서 기마 무예가 설 자리를 잃는다. 『무예도보통지』 24기 가운데 다섯을 차지하던 것이 이 시기에 사실상 끊기고, 오늘의

1880~1900년대

개항장의 스포츠

외국인 거류지가 생긴 항구가 근대 스포츠가 들어오는 첫 문이었다. 축구가 제물포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하는 것도 이 조건 때문이며, 서울보다 항구가 먼저 본 종목이

1880~1900년대

근대 스포츠의 전래

야구·축구·농구·정구 같은 종목이 개항 이후 삼십 년 사이에 들어왔다. 들어온 경로는 외국 군인·선교사·학교 셋으로 좁혀지나, 종목마다 누가 언제 처음 소개했는지

1881년

별기군

서양식으로 편성해 외국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신식 군대. 몸을 다루는 서구식 방법이 이 땅에 들어온 가장 이른 자리 가운데 하나이며, 학교 체조보다 십수 년 앞선다

1882년

축구의 전래

인천 제물포에 들어온 영국 배 플라잉피시호의 승무원들이 공을 차고 놀다가 두고 간 것이 시작으로 전한다. 이후 영국공사관과 외국어학교, 대한체육구락부 같은 단체를

1883년

원산학사

지역 사람들이 돈을 모아 세운 근대 학교. 개항장에 세워졌고 무예를 가르치는 반을 따로 두었다고 전한다. 서구 체육이 들어오기 전, 근대 학교가 몸을 어떻게 다룰

1880~1900년대

선교계 학교의 체육

배재·이화 같은 선교계 학교가 서구식 체조와 놀이를 교과에 넣었다. 관립학교의 병식체조와 달리 규율보다 놀이에 가까웠고, 여학교가 있었다는 점에서 여성이 몸을 쓰

1890~1900년대

체육이라는 말

체조·운동·경기·체육 같은 말이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 일본을 거쳐 들어온 한자 번역어이며, 조선에는 이 활동들을 한 묶음으로 부르는 말이 없었다. 무

1890~1900년대

관립외국어학교

영어·일어·러시아어 등을 가르치던 관립학교들. 외국인 교사가 있어 근대 스포츠가 일찍 들어왔고, 1896년의 화류회도 그 가운데 영어학교에서 나왔다.

1894년

갑오개혁과 몸

신분제가 법으로 폐지되면서 몸 쓰는 일의 지위도 흔들렸다. 조선 오백 년 동안 글 읽는 일보다 낮게 여겨지던 것이 다음 해 교육입국조서에서 교육의 한 축으로 오르

1895년

『서유견문』이 본 서구의 운동

유길준이 서양을 다녀와 적은 견문록. 그곳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고 겨루는 방식이 서술되어 있어, 조선 사람이 서구 체육을 관찰해 남긴 이른 기록이 된다. 조선통신

1895년

교육입국조서

교육의 근본을 덕·체·지 셋으로 밝힌 조서. 몸을 기르는 일이 국가 문서에서 교육의 한 축으로 명시된 첫 자리이며, 이후 학교 교과에 체조가 들어가는 근거가 된다

1895년

한성사범학교 체조 교과

교원 양성기관의 교과에 체조가 들어갔다. 몸을 다루는 일이 국가 교육과정의 항목이 된 첫 자리로, 근대 체육이 제도로 진입한 지점이다.

1890~1900년대

병식체조

학교 체조 교과의 내용이 군대식 제식 훈련에 가까웠다. 근대 체육이 스포츠가 아니라 규율과 국방의 언어로 들어왔음을 보여 주며, 이 성격은 일제강점기 체육 교육으

1890년대 후반

무관학교

대한제국이 세운 장교 양성 기관. 조선의 무과가 폐지된 자리를 대신했으나 시험이 아니라 교육으로 바뀌었고, 과목도 활쏘기가 아니라 체조와 검술이었다. 무예에서 근

1890년대 후반 이후

운동회의 종목

걸음 수로 잰 달리기, 공던지기, 멀리뛰기와 높이뛰기, 이인삼각, 당나귀달리기, 동아줄끌기가 나란히 있었다. 육상 종목과 놀이가 한 프로그램에 섞여 있었다는 뜻이

1890~1900년대

재는 일이 들어오다

달린 거리를 걸음 수로 적고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 운동회와 함께 들어왔다. 조선의 겨루기는 이겼는가 졌는가로 끝났으나, 근대 스포츠는 얼마나 빨랐는가를 남긴다.

1890~1900년대

신문의 체육 논설

신문이 체조를 권하고 운동회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왜 몸을 길러야 하는지를 논설로 폈다. 이 글들이 '강한 몸이 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논리를 퍼뜨렸고, 오

1890년대 후반 이후

학교 운동회

학교가 여는 운동회가 근대 스포츠를 대중에게 처음 보인 자리였다. 달리기·줄다리기 같은 종목이 마을 구경거리가 되었고, 연설과 창가가 함께 붙어 체육 행사이자 계

1890~1900년대

신문과 체육

신문이 운동회를 알리고 체조를 권하며 체육 여론을 만들었다. 대회가 열리면 지면에 실렸고, 그 기사가 오늘날 이 시기를 재구성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가 된다.

1896년 5월 2일

화류회

한성영어학교 학생들이 동소문 밖 삼선평으로 나가 연 운동회. 교사 허치슨이 이끌었고 300·600·1350보 경주, 공던지기, 멀리뛰기, 높이뛰기, 이인삼각, 동

1890년대 후반

황학정

궁궐 안에 설치된 활터. 서구 스포츠가 밀려드는 시기에 전통 활쏘기가 제도로 남은 자리이며, 오늘날 국궁 사정 문화의 뿌리로 이어진다.

1900년대

연합운동회

여러 학교가 함께 여는 큰 운동회. 수천 명이 모이는 자리라 연설과 창가가 붙었고, 통감부가 이를 경계해 규제하기에 이른다. 운동회가 단순한 체육 행사가 아니었다

1900년대

운동장이라는 공간

학교에 운동장이 딸리면서 몸 쓰는 일을 위해 마련된 빈 땅이 생겼다. 그전까지 겨루기는 장터·강가·마을 앞처럼 다른 쓰임의 땅에서 벌어졌으므로, 전용 공간이 생긴

1900년대

여성의 옷과 몸

여학생이 체조를 하려면 옷부터 문제가 되었다. 치마와 예법이 몸을 크게 움직이는 것을 막았고, 이를 두고 신문에서 논쟁이 이어졌다. 여성 체육의 첫 걸림돌은 능력

1900년대

여자 체육의 시작

여학교가 서면서 여성도 체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옷차림과 예법이 걸림돌로 논쟁이 되었고, 몸을 움직이는 일이 여성에게 허용되는가라는 물음이 체육을 통해 공론에 올

1900년대

황성기독교청년회

선교 조직이면서 근대 스포츠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다. 실내 체육 시설과 지도자를 갖춘 드문 기관이라, 구기 종목이 이곳을 거쳐 퍼졌다는 서술이 널리 통용된다.

1900년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구기 보급

총무 질레트가 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1905년경)와 농구(1907년 봄), 빙상(1908년)을 잇달아 가르쳤다. 한 사람과 한 조직을 통해 세 종목이 들어온 셈

1900년대 중반

야구의 전래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 질레트가 회원들에게 가르치며 들어왔다. 최초의 경기는 1906년 2월 11일 훈련원에서 열린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덕어학교의 대전으로 기록된다.

1900년대

체육과 구국운동

국권이 흔들리는 시기에 체육은 '강한 몸이 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논리로 계몽운동과 묶였다. 체육단체가 잇달아 서고 신문이 체조와 운동을 권한 것이 이 맥락이며,

1906년 3월 11일

대한체육구락부

현양운·신봉휴 등 팔십여 명이 발기해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 사회체육 단체. 축구를 위해 만든 조직이라는 뜻으로 경구구락부라고도 불려, 최초의 축구 단체이기도 하

1906년

자전거의 전래

탈것으로 들어온 자전거가 곧 경주가 되었다. 1906년 4월 22일 훈련원에서 열린 대회가 최초의 자전거 경기로 인정된다. 자전거가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는 기록이

1907년 봄

농구의 전래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 질레트가 소개했다. 종목이 미국에서 고안된 지 열대여섯 해 만의 전래로, 이 아카이브의 근대 종목 가운데 본고장과 시차가 가장 짧다. 본격적

1907년 이후

군대 해산과 체육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군인 출신들이 학교와 체육단체로 흘러들었다. 체육이 국방의 대체물로 다뤄지는 성격이 이때 더 짙어진다.

1907년 10월

대한국민체육회

노백린이 주도해 세운 체육단체. 그해 10월 15일 발표한 취지서에 체육이 덕·지와 나란한 국민 교육의 요소라고 적었다. 군대가 해산된 해에 군인 출신이 체육 단

1908년

빙상의 전래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질레트가 회원들을 지도하며 시작되었다. 오늘날 한국 동계 올림픽 금메달의 거의 전부가 빙상에서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한 줄이 그 출발점이

1910년

국권 상실과 체육단체

병합과 함께 한국인이 세운 체육단체 대부분이 해산되거나 활동을 멈췄다. 체육이 다시 조직되기까지 열 해가 걸리고, 그 자리를 1920년 조선체육회가 잇는다.